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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동개인돈 처음부터준비해야죠앱에서 작성

ㅇㅇ 23-05-27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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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src="https://korea-money.com/data/editor/2305/81a441eaff2b86852184b3caf0839e29_1685134881_2869.png" title="81a441eaff2b86852184b3caf0839e29_1685134881_2869.png"><br style="clear:both;"><br></p>시장의 기억(한국의 자본시장은 어떻게 반복되는가?)★★★★★ (이태호 지음, 어바웃어북, ’20.4.6) ​프롤로그 기억의 상실은 실수의 반복을 낳는다권두스페셜한국자본시장을 뒤흔든 주요사건한국 자본시장의 주요정책 한국 자본시장 인프라변화경제성장률과 주요 금리정책주가지수와 주식형펀드 설정잔액환율과 경상수지Chapter 1투기 혹은 투자에 관한 오래된 기억들#1 일제강점기 쌀 선물시장의 흥망(조선판 선물시장, ‘투기의 신’, 반복창을 아십니까?)#2 1956년 대한증권거래소 설립(전쟁의 잿더미에서 태어난 대한민국 자본시장)#3 1958년 국채파동(버블의 추억: 한국 채권시장의 흑역사)#4 1962년 증권파동(60년대 작전주, 그 뒤에 중앙정보부가 있었다)Behind #14대 의혹 사건 Chapter 2성장의 그늘에 가려진 자본과 권력의 발톱#5 1972년 8.3 사채 동결조치(경주와 아무 상관없는 ‘작전명 경주종합개발’의 전모)#6 1974년 5.29 강제 상장조치(재벌의 주식 주머니를 겨눈 권력의 총구)#7 1978년 건설주 파동(중동 특수가 지핀 건설주 광풍, ‘묻지마 투자’의 대가는 컸다)Behind #2‘7공자 사건’과 ‘무등산 타잔 사건’ Chapter 3구멍 밖으로 나온 개미들, 세상은 넓고 투자처도 많았다!#8 1979년 여의도 증권가 시대 개막(그 시절 증권사들은 왜 여의도 이전을 꺼렸나)#9 1983년 공동전산화시스템 개막(딱딱이에서 전자시세판으로, 주식거래에 얽힌 小史)#10 1989년 코스피지수 1,000돌파(‘주식불패 신화’에 국민 절반이 빚으로 투자)#11 1992년 자본시장 개방(低PER株 투자러시, ‘우물안’개미들은 환호했다)Behind #3굿바이, 야후! 메신저 Chapter 4국가부도 소용돌이에 한꺼번에 무너진 대기업과 금융시스템#12 1991년 단계적 금리 자유화 진입(만능 자금줄이 된 CP, 독사과를 문 기업들의 몰락)#13 1994년 종합금융회사 추가인가(지방단자회사의 폭주, 그 끝엔 ‘국가부도의날’)#14 1996년 사상 최대 경상적자(‘강달러 쓰나미’외면, 정치권은 대선이 먼저였다)#15 1997년 IMF 구제금융 신청(‘밀사’급파하면 IMF에 저항, 그 대가는 혹독했다)Behind #4 ‘검은거래’의 고리, CD Chapter 5서슬퍼런 구조조정 시대 개막, 고도성장기 유산을 청산하라!#16 1997년 금융개혁법안 통과(정부와 한국은행의 반세기 전쟁)#17 1998년 은행의 강제퇴출(조상제한서의 몰락, 은행불사의 신화가 무너지다)#18 1998년 대기업 사업 구조조정(청와대의 극비 프로젝트, ‘5대 그룹 빅딜’)#19 1999년 대우그룹 워크아웃 신청(대우의 몰락배후에 제거 프로그램이 있었다)Behind #5대우채 처리와 포퓰리즘 Chapter 6밀레니엄 자본주의 시대를 연 주인공들#20 1999년 투자신탁회사의 몰락(펀드공룡 3투신은 왜 멸종했을까?)#21 1999년 20년 대장주의 탄생(삼성전자의 탄생, 그 뒤에 ‘한비사건’이 있었다)#22 2000년 채권 시가평가 시행(‘검은 거래’의 관행을 뒤바꾼 혁명)Behind #6현대그룹 ‘왕자의 난’ Chapter 7거품 위를 걷는 사람들#23 2000년 닷컴 버블의 붕괴(신뢰의 붕괴가 몰고 온 코스닥 20년 침체)#24 2003년 신용카드 사태(플라스틱 버블이 초래한 ‘신불자 400만’시대)#25 2004년 적립식 펀드 열풍(미래에셋 박현주의 신화는 여전히 유효한가)#26 2006년 부동산 광풍(아파트 불패 신화가 낳은 ‘시한폭탄’가계빚)Behind #7‘불황을 꿈꾸는’ 슈퍼리치의 상품 Chapter 8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 ‘금융위기’라는 악몽#27 2003~2008년 원자재 슈퍼사이클(초호황 누린 조선.해운의 침몰, 위기의 서막을 열다)#28 2008년 리먼브라더스 파산(‘도시락 폭탄’의 제조자들)#29 2008년 주가 대폭락(증권업계가 혼비백산했던 ‘대폭락의 추억’)#30 2009년 자본시장법 시행(숲만 키운다고 호랑이가 찾아올까? ‘동북아 금융허브’라는 허상)Behind #8‘미네르바 신드롬’과 3월 위기설 Chapter 9저금리 시대가 부른 고위험 자산의 유혹#31 2011년 저축은행 사태(뱅크런 32조, 역대 최대의 금융비리)#32 2013년 동양그룹 법정관리 신청(시멘트와 과자로 성장한 동양, 금융사업 확장으로 빚더미)#33 2020년 기준금리 0%대 인하(‘한강의 기적’이 저물자 고금리시대로 ‘굿바이’)Behind #9양적완화가 기운 비트코인 광풍 프롤로그 기억의 상실은 실수의 반복을 낳는다Chapter 1투기 혹은 투자에 관한 오래된 기억들#1 일제강점기 쌀 선물시장의 흥망(조선판 선물시장, ‘투기의 신’, 반복창을 아십니까?)- 인천 미두취인소는 일제가 미곡의 품질과 가격을 표준화한다는 명목으로 1896년에 세운 조선 최초의 쌀 선물거래소, 쌀과 콩 등 여섯가지 곡물을 거래- 백범 김구의 제자였던 강익하는 미두 거래로 큰돈을 벌어 해방 직후 최초의 민간 보험회사인 대한생명(현 한화생명)을 창업- 대한제국 말 갑부 조중정의 장남인 조준호는 1934년 동아증권을 차림, 광복 후에는 서울 충무로에 사보이호텔을 세웠다.(2020년 현재 조준호의 손자인 조현식 대표이사가 3대째 사보이호텔을 경영하고 있음)- 인천 인구 1910년 14,000명(조선인)+13,000명(일본인), 1930년은 10만명- 1921년 결혼식 당시, 3만원(2019년기준 2억원)을 쓴 ‘투기의 신’ 반복창, 조선에서 가장 행복한 신랑, 한때 재산을 40만원까지 불렸지만, 그 후 손실로 전 재산을 날림. 아내 김후동마저 세 아니 남기고 떠나고 서른이 되어서 중풍으로 반신불수, 1939년 40세나이에 송림리(송림동) 곁방에서 초라하게 생을 마감- 인천미두취인소는 중일전쟁3년째에 접어든 일제가 전시 자원 동원을 위해 쌀값을 직접 통제, 미곡산업도 타격, 1936년 마산에서 정미소를 차렸던 26세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 1938년 23세 쌀가게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도 1939년 인천미두취인소 폐쇄 여파로 쌀 사업을 접어야- 1996년 한국 선물시장 다시 open, 코스피200선물을 상장한 때, ‘압구정 미꾸라지(윤강로)’, ‘목포 세발낙지(장기철)’, ‘전주투신(박기원)’ 등 신진 고수들이 새로 쓴 성공신화로 다시 일확천금의 꿈에 불을 붙였다. 하지만 금융당국은 개인투자자들의 진입 문턱을 꾸진히 높이며 참여를 제한- 2010년 11월11일 ‘도이치 옵션쇼크’, 마감 직전 동시호가 때 도이치증권코리아 2조원 넘는 물량을 쏟아냄. 코스피지수는 10분만에 53포인트(2.7%)급락, 풋옵션을 미리 매수하는 방식으로 449억원 부당이득 챙김- 2011년 ‘스켈퍼(scalper,초단타 투자자) 불공정 거래 수사’를 전환점으로 주식워런트증권(ELW)로 급격히 식어짐- 한국의 파생상품 거래량은 2020년 수년간 주식시장과 비슷한 세계10위 수준규모 #2 1956년 대한증권거래소 설립(전쟁의 잿더미에서 태어난 대한민국 자본시장)- 獨波兩國軍遂開戰(독일과 폴란드가 마침내 전쟁을 시작했다)- 1939년 9월1일 경성거리 호외, 독일의 폴란드 침공, 조선의 증권시장은 맹렬한 기세로 치솟기 시작, 제1차 세계대전(1914~1818)때의 경험으로 유럽의 확전이 가져올 효과를 직감한 투자자들이 공격적으로 주식을 사들였기 때문, 군수물자 특수로 인한 일본 경제 대호황이 눈앞에- 9월3일,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 조선증권취인소 대장주였던 동신(도쿄증권취인소 주식)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닷새 만에 주당 170원으로 24%(35원)뜀. 조신(조선증권취인소 주식), 조석(조선석유) 등 다른 일본인 소유의 조선 기업 주식도 가파르게 상승- 1940년 9월, 일제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 연합군이 석유 봉쇄- 1941년 12월7일, ‘진주만 공격’, 하와이의 미국 태평양함대를 기습 폭격- 1945년 8월, 미군정은 조선증권취인소의 패쇄를 공표, 한반도의 자본시장은 완전한 암흑기- 1920년 대형 전문 중매점인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 등장(‘경취’), 조선인9명과 일본인 17명이 세운 사설 거래소, 제1차 세계대전 직후로 호황에 힘입어 빠르게 성장, 1923년 9월 발생한 관동(간토)대지진과 1929년 미국발 세계 대공황으로 경영난- 1931년 5월, ‘조선취인소령’을 제정, 경영난에 허덕이던 경취는 조선 최초의 선물거래소인 ‘인취(인천미두취인소)’와 하나로 합침- 1938년 거래종목이 284개, 수수료 수입 증가에 힘입어 취인소 주식 액면가의 7~18%에 해당하는 배당금도 매년 지급- 1947년 여름, 서울 남대문로2가 지요다(千田)빌딩, 남성40명, “증권구락부 발족의 출발점”, 송대순씨(대한증권업협의회 초대 회장), 동아증권 경영했던 사보이호텔그룹 창업자 조준호, 전방의 창업자 김용주(김무성대표 부친) 함께함- 1949년 11월, 해방후 1호 증권사 대한증권(현 교보증권) 설립- 1950년 6월 25일 전쟁속 국내 증권산업 뜻밖의 호황,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 몰려든 피란민 사이에서 ‘지가증권’과 ‘건국국채’거래가 급증- ‘지가증권(地價證券)’은 이승만 정권이 농지를 재분배하는 과정에서 옛 지주들에게 배정한 채권, 1950년 3월 소작농에게 땅을 나눠주고 땅값을 5년간 나눠 치르게 한(생산량의 30%씩 현물 납부)농지개혁법의 부산물- 생계가 급한 지주들은 1951년 1.4후퇴 이후 부산 광복동에 자리 잡은 대한증권을 찾아 지가증권을 헐값에 처분, 액면가치 20%대로, 정부가 몰수한 일본인 재산을 민간에 되팔면서 매수대금을 지가증권으로 치를 수 있도록 했기 때문- 1952년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은 소화기린맥주(현 OB맥주)를 받으면서 잔금 일부를 싸게 사모은 지가증권으로 지급, 최종건 SK그룹 창업자는 1953년 선경직물(현 SK네트웍스)을,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자는 1952년 조선화약공판(현 한화)를 사들일 때 대금 일부를 지가증권으로 결제- 1952년 제2호 증권회사 고려증권, 1953년 영남, 국제, 동양이 차례로 증권영업- 1953년 7월 정전협정, 11월 사단법인 대한증권업협회 설립, 옛 조선증권취인소(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의 후신) 3층 건물의 임차 계약, 공동 설립한 한국연합증권금융(현 한국증권금융)자금으로 복구공사를 진행- 1956년 2월, 대한민국 최초의 거래소인 대한증권거래소(현 한국거래소) 설립. 3월3일 성대한 개소식 #3 1958년 국채파동(버블의 추억: 한국 채권시장의 흑역사)- 1958년 1월 17일, 김현철 재무부 장관은 “전날 국채 거래를 모두 무효로 한다” 긴급명령 공포, 정부가 국채 가격 폭등에 따른 결재 불이행의 사태를 막기 위한 극약 처방- 투기적 거래를 주도한 증권사 4곳은 면허를 빼앗겼다. 민간자금은 빠르게 주식시장으로 이동, 1990년대 말까지 약 40년간 이어진 ‘한국 채권시장 암흑기’의 서막- 첫 투기적 거래는 채권시장, 당시 10여 종목(조흥,저축,상업,경성방직,경성전기,남선전기,조선운수,해운공사,조선공사)에 불과, 정부 또는 소수의 큰손이 지분90%를 소유, 이자도 안나오는 종잇조각- 적재 재정에 시달리던 정부가 1950년 처음 발행한 뒤 금융회사에 할당하거나 소액으로 쪼개 팜- ‘오분리(五分利) 건국채’ 표면금리 5%, 발행 첫해 액면 금액의 20%안팎에서 매수 가능, 이자만 2~3년 거치, 2~5년 원리금 분할상환, 원금의 5배돌려 받음, 1956~1961년까지 유통증권의 약80%차지- 채권시장은 완벽한 도박장, 증권사들은 가진 돈 없이 ‘큰 손’흉내, 대규모 공매수와 공매도 반복, 1958년 1월 16일 정점, 오전 28환으로 폭락한 가격이 45환으로 마감- 보다 못한 대한 증권거래소는 1월17일 청산거래를 중단하고 긴급 이사회, 建玉(미결제약정)의 매매증거금을 즉시 납부하라고 지시, 보고받은 재무부는 1월16일자 거래를 아예 취소- 한국의 채권시장은 1997년 외환위기를 겪은 뒤에야 본격적으로 성장, 한국의 채권 발행잔액은 2019년 말 약2,000조원, 한 달 거래대금 400조원 #4 1962년 증권파동(60년대 작전주, 그 뒤에 중앙정보부가 있었다)- 1961년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일환으로 자본시장 육성 천명, 대증주(大證株, 대한증권거래소 발행주식) 가격이 폭등, 4월에는 액면가의 80배, 1962년 5월 거래소 1개월 거래대금은 6년간 누적대금과 맞먹는 규모- 매수대금을 나중에 지불하겠다는 ‘이연결제’규모가 갑작스럽게 늘면서 매도자에게 현금을 내줘야 하는 거래소가 유동성 위기, 당시 거래는 익일 결제가 원칙, 이연료만 내면 대금 납입을 최장 2개월까지 연장가능- 1962년 6월 10일 정부의 화폐개혁(10환 --> 1원) 핑계로 1963년 2월 25일부터는 73일간 거래소 문을 열지 못했다- 1963년 8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공화당 총재, 10월 대선에서 46.7%로 제5대 대통령 취임(제 3공화국)- 1964년 야당은 군사정권의 정치자금 조달을 둘러싼 4대 의혹 사건, 국정감사, 윤응상 일흥증권사장이 중앙정보부로부터 9억환을 받아 460억 환의 부당 이득을 챙겼고 이 중 67억환이 다시 중앙정보부(1963년 6월 전원 무죄판결)- 군사정권 초기 자본시장에 불을 지피려던 계획은 중앙정보부의 시세조종 개입 + 태동기 주식시장에 강한 불신 = 1965년까지 3년간 단 하나의 IPO도 유치 못함- 1970년대 기업공개 촉진 정책, 1979년 거래소를 여의도로, 1988년 정부 지분을 다시 증권사 등에 넘겨 회원제 민영기관으로, 2005년 코스닥시장과 선물거래소 등 통합, 2019년 말 상장종목 2,100개, 시가총액 1,700조로 세계 15위 규모 Behind #14대 의혹 사건- 1963년 ‘4대 의혹사건’, 증권파동, 워커힐사건(건설비 일부 횡령의혹, 1975년 SK그룹으로, ‘워커’는 낙동강 전선사수 공헌초대 미8군 사령관 Walton H. Walker에서), 새나라자동차 사건(일제 승용차를 무관세로 들여온 뒤 고가에 판매), 빠찡꼬 사건(영업규제인 것을 중앙정보부가 뇌물을 받고 영업장 승인하려), 사건의 기획자는 김종필, 그해 외유, 귀국 후에는 국무총리역임, 1979년 10월 26일 전두환 신군부는 1980년 6월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낙인찍고 자산 216억원을 몰수- 2015년 김종필은 증권파동 개입 인정, 사과, 워커힐 사건과 새나라자동차 사건의 경우 착복한 이익 없다고 주장 Chapter 2성장의 그늘에 가려진 자본과 권력의 발톱#5 1972년 8.3 사채 동결조치(경주와 아무 상관없는 ‘작전명 경주종합개발’의 전모)- 1972년 8월 2일 11시 40분, ‘작전명 경주종합개발’,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 ‘8.3 私債동결조치’, 8월 3일, 박정희 정부는 이날 0시를 기해 모든 기업의 사채를 ‘월 이자 1.35%(연16.2%), 3년 거치 후 5년 분할상환’으로 조정한다고 발표(전년도 물가상승률 14%수준 감안)- 1971년 6월 11일, 김용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당시 경방 명예회장)은 청와대를 찾아가 ‘기업들에 퍼져있는 사채 규모가 1,800억원대에 달해 이대로라면 살아날 수 있는 기업이 없다’며 전격적 조치를 취해달라고 호소- 1971년 8월 15일, ‘닉스 쇼크’, 금태환 정지를 선언- 1972년 8월 9일, 사채신고 마감일에 드러난 지하경제 실체, 4만 677건의 총 3,456억원(당시 M1(현금+요구불예금)의 80%)- 8.3사채동결조치를 전환점으로 대기업부도사태는 진정국 면, 빚 부담을 덜어낸 기업들은 다시 투자를 늘리기 시작. 1972년 7.2%로 바닥을 찍은 실질GDP성장률은 이듬해 최고인 14.9%로 반등, 수출은 1973년 98.6% 증가- 8.3조치에 발맞춰 시행한 단기금융업법, 상호신용금고법, 신용협동조합법 등 ‘사금융 양성화 3법’, 오늘날 제2금융권 성장의 발판을 마련- 태국 등 동남아시아 단기금융회사를 본뜬 단자회사가 탄생, 어음의 발생시장과 유통시장을 열었다. 無盡업체로 불리며 계주 역할을 하거나 소상공인에게 돈을 빌려주고 ‘일수’를 찍던 전주들은 상호신용금고로 변신, 유대관계로 맺어진 계 모임은 비영리 조직인 신용협동조합으로 뭉쳤다- 이후 경제 안정은 중화학공업 육성- 8.3 사채동결조치는 국민의 사유재산권을 침해해 대기업에 특혜를 제공했다는 관점. 당시 사채시장 참여자 중에는 자녀교육비와 주택자금 마련을 위해 쌈짓돈을 굴리던 주부와 상인이 많았기 때문. 전체 건수의 90%가 300만원 이하 소액 사채, 금액으로는 32%차지- 국내 등록 대부업자는 2019년 6월말 기준 약8,300곳, 이용자수는 201만명, 국내 공모 회사채 시장의 중소기업 참여비중은 2019년 기준 2% #6 1974년 5.29 강제 상장조치(재벌의 주식 주머니를 겨눈 권력의 총구)- 1975년 5월, 월남 패망 직후, 설립7년차를 맞은 흑백TV제조업체 삼성전자공업이 주식을 공모, 공모가액 기준 30억원- 1975년 5월29일 ‘강제상장조치’는 ‘가족기업의 성벽’허물기, 국내 대기업그룹이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중화학공업화 투자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전기를 마련- 여신50억원이상 대기업그룹을 ‘비우량(A)’과 ‘우량(B)’기업군으로 나눈 뒤 비우량 기업군은 기업공개를 포함하는 재무개선, 우량기업군은 기업공개,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금융지원으ㄹ 중단. 대기업그룹의 소유 집중 문제를 반드시 해소하겠다는 강력한 의지표현- 공모가액 산정 때 액면가를 넘지 않도록 규제 ‘대주주 지분율 51% 이하’ 등 상장 요건을 맞추려면 헐값에 대규모로 주식을 팔아야. 상장사에는 액면가의 10%이상 배당을 의무화- 1973년 1월 기업공개촉진법 시행(1972년 8.3사채동결의 후속조치)에도 불구하고 신규 상장이 부진했던 이유- 1974년 8월8일, ‘기업공개보완시책’(8.8조치) 을 발표, 그룹사의 모기업, 중화학공업, 수출.차관 실적 등 정량지표로 ‘국민적 대기업’리스트를 추려 일반에 공개하겠다는 내용- 민간의 원활한 자본 공급은 산업구조를 기존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바꾸는 투자 확대에도 크게 기여- 1977년에는 증권감독원(현 금융감독원)이 발족- 1987년부터 대기업그룹을 지정하고 계열사 상호출자를 전면 금지 #7 1978년 건설주 파동(중동 특수가 지핀 건설주 광풍, ‘묻지마 투자’의 대가는 컸다)- 1976년 1월 15일, “포항 영일만에서 석유를 발견한 것은 사실입니다”, 끝내 실패- 에너지위기로 절망감에 빠진 국민들을 지켜보던 관료들도 점점 초조, 관심을 바다 밑 ‘검은 황금’에서 중동의 ‘오일 달러’로 돌리기 시작, 군인 정신으로 무장한 제대 장병 인력과 낮은 인건비를 앞세우면 붙어볼 만하다고 판다- 1982년 중동 진출 근로자는 151,500명으로 전체 남성 근로자수의 2%- 1977년 3월 11일 ‘주가동결 조치’, ‘묻지마 건설주 투자’가 확산하자 증권사들의 자진 결의를 통해 거품의 확산을 막고자 “이틀 전보다 비싼 값엔 건설주 매수 주문을 받지 않습니다”- 중동 국가들은 유가 폭등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돈을 사회간접자본SOC확충에 쏟아부었고 국내 건설사들은 수주전에서 잇따라 승전고를 울리고 있었다- 가혹한 근로 환경에서 흘린 땀과 맞바꾼 오일머니는 한국 무역외수입의 무려 24~50%를 차지. 1977년에는 고질적인 경상수지 적자까지 흑자로 돌려놓았다- 1975년 3월 압구정동 아파트 착공으로 불붙은 강남 개발의 붐도 중동 건설과 함께 건설주의 파죽지세를 이끈 쌍두마차. 하지만 오일 달러의 유입에 이은 기대 인플레이션 상승, 부동산 투기 열풍은 각종 사회 문제를 낳기도- 1975년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 25.2%, 1977년 10.1%로 내려 왔다가 빠르게 치솟기 시작, 1978년 6월 12일 ‘전격적인 금리인상’- 1978년 11월 22일, 건설주가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던 때 “종합적인 부양책을 내놓지 못하면 차라리 휴장하라” 시위- 1978년 8월 8일, ‘부동산 투기 억제 및 지가 안정을 위한 종합대책(8.8조치)’ 1979년 이란의 석유수출 중단발표로 ‘2차 오일쇼크’, 건설주는 회생불능- 1981년 5월, 장영자, 이철희 부부, 중견 건설업체 등으로부터 대규모 어음 받아 사채시장 할인, 2,624억원 Behind #2‘7공자 사건’과 ‘무등산 타잔 사건’- 박동명(박태선 시온그룹회장 아들), 외화26만달러 불법 유출 구속수사과정서 연예인 낀 문란한 사생활 드러남- 1975년 6월 15일자 동아일보, “7공자 플레이보이 클럽” 존재- 1977년 4월 20일, 무등산 덕산골 무허가 주택 철거하던 4명의 철거반원이 잔인하게 살해당함. 살인범은 20세 청년 박흥숙, 소리만 나는 사제 총으로 철거반원을 위협, 포박한 뒤 한 사람씩 쇠망치로 머리를 내리쳤다. 1974년 무등산 산등성이에 움막 수준의 거처를 지었고 어머니, 여동생을 불러 함께 거주, 전국체전 개최를 앞두고 무등산국립공원 개발사업, 판자촌을 부수기 시작, ‘어머니를 위한 집’을 불태우자 이성을 잃었다 Chapter 3구멍 밖으로 나온 개미들, 세상은 넓고 투자처도 많았다!#8 1979년 여의도 증권가 시대 개막(그 시절 증권사들은 왜 여의도 이전을 꺼렸나)- 1966년 7월, 한강 범람하여 서울 인구 380만명 중 4만명의 이재민 발생, 김현옥 서울시장, 곧바로 한강 유역 백사장을 강변도로와 제방으로 탈바꿈. 12월 한국 최초 계획도시 세우는 작업, 장마 때마다 물에 잠겨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해 사람들이 ‘너나 가지라’ 뜻의 ‘여의도(汝矣島)’- 1974년 명동 증권거래소가 확정이전 결정, 대규모 증권타운 입주계획시작, 1990년 중반 증권사들이 앞다퉈 신축- 1968년 2월, 주로 목선 제조와 수리일 하던 주민(창전동 소재 와우산 기슭으로 이전) 62가구 440명 터전 밤섬 폭파, 여의도 둘레 7km, 15m 둑 윤중제공사 골재로 사용, 육군 준장출신 40세 14대 서울시장 김현옥, 현장에서 숙식, 290만㎡인공대지 100일만에 조성- 1969년 마스터플랜 김수근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사장, 서쪽 국회의사당, 동쪽 서울시청과 대법원 및 종합병원, ‘꿈의 수상도시’- 1970년 4월 8일, ‘창전동 와우지구 시민아파트 붕괴참사’로 불도저 시장 사임하고 양택식시장은 날림공사 오명 씻고 재원 확충위해 1971년 대법원 부지에 최고층 13층 시범아파트 건설, 비상 활주로 초대형 아스팔트 광장- 공공시설 유치 난항으로 부지 매각, 73년 순복음교회, 75년 우체국,노총회관 76년 KBS, 77년 한국화재보험협회, 78년 한국교직원공제회, 79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입주, 증권거래소(7월2일), 종합병원부지에 85년 63빌딩, 2005년에는 KIC발족, 2006년 54층 IFC착공- 국회의사당터가 조선시대 양과 염소 등 가축을 풀어 키우던 양말산(羊馬山)- 2015년 조선시대 주전소 자리인 중구 수하동으로 미래에셋대우, 2016년 대신증권은 명동- 산산조각난 밤섬은 폭파당시 규모의 6배로 커짐. 흙이 쌓이고 초목이 자라난 결과 #9 1983년 공동전산화시스템 개막(딱딱이에서 전자시세판으로, 주식거래에 얽힌 小史)- 1978년 1월 21일 대신증권, 고객100여명, 국내 증권산업 역사상 최대 금액24억원(대신증권 자본금 50억원)사고보고, 양재봉 대신증권(주식위탁매매 점유율2위) 창업자 사임. 1977년말 박황 대신증권 영업부장 사고로(고객자산 5억원을 굴리는 ‘스타’, 수기거래 기록의 허점을 악용한 범죄)- 국내주식거래는 1970년대 중반까지 격탁매매(擊柝), 개별경쟁매매는 1975년부터 대체, 훨씬 많은 종목의 주문을 시시각각 소화- 1988년 ‘주식자동매매체결시스템(SMAT)’ 주식 거래의 완전한 전산화, 1979년 7월 서울 여의도 증권거래소입회장에서 처음 선보인 시세게시판, 9월 대신증권을 시작으로 주요 증권사 영업장으로- 1999년 국내 최초의 온라인증권사 이트레이드 증권(이베스트투자증권)와 미래에셋증권(미레에셋대우), 2000년 키움닷컴증권(키움증권), 2017년 ‘수수료 평생제로’- 2013년 한맥투자증권 직원 주문실수로 460억원 손실내고 2015년 파산, 2018년 삼성증권은 존재하지 않은 100조원대 배당금 지급사고 #10 1989년 코스피지수 1,000돌파(‘주식불패 신화’에 국민 절반이 빚으로 투자)- 1985년 9월 22일, 이산가족 상봉 온 국민 눈시울, 쌍둥이 적자로 궁지에 내몰린 레이건 정부의 요구를 일본, 서독, 영국, 프랑스 등이 전격 수용. ‘플라자 합의’ 한국과 일본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꿔놓는다- 일본 기업들의 덤핑 공세로 ‘사업 철수’위기론 까지 불거졌던 삼성반도체통신(삼성전자)은 1985년 가을부터 ‘64KB램’공장을 풀가동하고 신제품인 ‘256KD램’양산준비- 1985년초 139포인트, 1988년 4월 개인투자자들이 포항종합제철 공모주 청약, 1989년 3월 31일 1,000.31포인트, 1990년 5월 4조원이 ‘증시안정기금’조성, 1990년 9월 17일 566포인트- 1994년 경기회복 1,000선, 1997년 외환위기로 200대, 1999년 정보기술주 급등으로 1,000, 2001년 거품붕괴로 반토막, 2005년 1,000 #11 1992년 자본시장 개방(低PER株 투자러시, ‘우물안’개미들은 환호했다)- 1981년 1월, ‘자본시장 국제화 장기계획’, 1990년 중반까지 ‘외국인 간접투자’, ‘국내기업의 해외 증권발행’, ‘외국인 직접투자’를 순차적으로 허용- 1981년 11월 ‘외국인전용수익증권’ 1,500만달러 규모 한국국제신탁(KIT)를 출시, 대한투자신탁이 미국 메릴린치를 대표 주관사로 같은 금액의 Korea Trust를. 1년뒤 원금을 까먹으면서 정부의 자존심에 상처- 1984년 대우증권의 도쿄사무소를 필두로 30여개사 해외 사무소- 1984년 5월 코리아펀드는 주식을 발행해 투자자를 모집하고 운용 수익을 배당금 형태로 돌려주는 뮤추얼펀드. 미국 스카다스티븐스&클락과 대우증권을 끌어들여 미국 메릴랜드에 법인등기. 6천만달러 투자금 모임 8월 뉴욕 증권거래소 상장. 주당 12달러로 공모. 1년만에 10배, 1980년대 중후반 ‘3저(금리,유가,원화가치)호황’- 1985년부터 국내기업의 해외자금 조달 허용, 12월 삼성전자 2천만달러의 CB발행 성공. 15년만기 5%, 대우중공업 4천만, 대한석유공사 2천만, 금성사 3천만달러 발행성공- 1992년 1월 3일, 외국인에게 주식시장 개방, 69억원어치 직접 매수, 766개 상장종목중 512개가 가격제한폭까지, 92년 연간 1조5천억원어치 순매수, (2019년말 593조원)- 1992년 종목당 10% 한도로 외국인의 국내 주식 직접투자 허용, 태광산업, 한국이동통신서비스, 신영, 대한화섬 등 저PER주 쓸어담음. 외국인의 가치주 사냥은 전체 주가 수준을 끌어올림. 1996년 20%로 확대- 1997년 8월~11월, 외국인은 약2조원(19억달러) 순매도- 1997년 종목별 55%로 대폭확대, 1998년 5월 완전철폐- 국내 금융회사들은 2017년부터 소액 투자자의 ‘성실한 집사’역할을 강조하는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고 의결권 행사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Behind #3굿바이, 야후! 메신저- 2016년 8월 31일 자취를 감춤 Chapter 4국가부도 소용돌이에 한꺼번에 무너진 대기업과 금융시스템#12 1991년 단계적 금리 자유화 진입(만능 자금줄이 된 CP, 독사과를 문 기업들의 몰락)- 1990년대 전반에 걸쳐 CP금리는 91~180일의 짧은 만기에도 불구하고 3년만기 회사채 금리를 웃돌았다. CP는 발행 신고 의무 없고 정부의 감시 자유로워 빚에 허덕이는 20~30대 그룹사를 위한 ‘맞춤형’서비스- 1990년대 중반 30대 대기업그룹의 1/3이 쓰러진 배후에는 천문학적인 “유령금융비용”, 지출증빙을 찾을 수 없는 1조 원의 행방을 추궁하자 “1조원을 5년간 빌리면 ‘자금 조성비’로 6,000억원이 빠져 나갔습니다”(1999년 한보 청문회 정태수 회장), 은행들의 ‘꺾기’관행- 한보에 1억원당 3백만원, 12%의 자금조성비를 요구, 매년 눈덩이처럼 늘어나는 금융비용을 분식회계를 통해 채워 넣었다- 1991년 여름, 노태우 정부는 공금리와 실세금리의 격차가 줄어든 시점을 기회로 1996년까지 순차적 금리 자유화 계획을 확정 발표, 만기가 짧고 거액인 상품부터 부분적으로 자유화하는 게 금융시장의 충격을 줄일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판다- 이용만 재무부 장관이 1993년 1월 은행들과 함께한 조찬간담회에서 “꺾기를 하지 않는 은행이 하나도 없다”라며 개탄, 자금난에 시달리던 중소기업 사장이 “금융자원 배분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는 일도- 1993년 취임한 김영삼대통령은 ‘신경제 5개년 계획’을 발표 곧바로 모든 대출금리 자유화- 1995년 1월, 멕시코 페소화 위기, 8천억 빚 덕산그룹 최종부도, 단자사는 생존위한 투자자금 회수, 1997년 1월 10위 한보그룹, 4월 삼미, 진로그룹, 5월 대농그룹, 7월 기아그룹, 11월 해태, 뉴코아그룹, 12월 한라그룹, 8대 대기업그룹 29조원 부도 #13 1994년 종합금융회사 추가인가(지방단자회사의 폭주, 그 끝엔 ‘국가부도의날’)- 1972년 단자회사의 출생배경은 ‘8.3사채 동결 조치’로 양성화한 사채업이 뿌리.- 1973년 오일쇼크 여파로 외환 부족에 시달리던 박정희 정부는 외자 도입원 확대를 위해 1975년 ‘종합금융회사에 관한 법률안’을 마련하고 대기업의 참여유도, 그결과 1976년 1호 한국종금(최대주주 대우그룹), 1979년 국제(현대), 새한(산업), 한불(한진), 아세아(대한방직), 한외(외환은행)등 ‘선발6개사’탄생. 1994년 9곳, 1996년 15곳의 단자회사에 종금업허용- 일본엔화를 단기로 빌려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 신흥시장 정크본드에 장기투자, 국제금융을 통해 얄팍한 마진만 남기는데 익숙했던 선발종금사 , 1996년말 종금사 자산총액은 156조원 일반은행 342조원의 1/2- 국제금융 업무의 초점도 갈수록 위험. 빌려온 달러를 높은 이자를 받고 장기로 대출, 1997년 10월말 종금사 외화조달 잔액은 약 200억달러. 이중 60%는 1년 미만- 1997년 7월, 기아그룹 계열 18개사 부도유예 협약신청, 국내 30개 종금사 기아그룹 여신 3조원대 현금을 묶음. 해외 금융사 만기연장없이 회수, 종금사 연쇄도산 7대 대기업 빌려준돈 6조원, 전체 자기자본 4조원보다 많은 규모- 한국은행 16개 종금사에 1조원 한도 특별대출, 한국 금융시스템 전체 마비, 1997년 12월 14개 종금사 영업정지, 1998년 1월 예금지급 재개 했으나 뱅크런- 1998년 1월 5일, 전국 14개 종금사에 영업정지(‘97년 12월 2일에 9개사, 10일에 5개사)로 인출 예금주 인파모임, 전체 종금사의 개인예금 2.9조의 40%, 한국 금융 역사상 가장 극적인 ‘뱅크런(Bank Run)’사태(‘98/1/5~1/7일간)- 국내외 저리 자금으로 설비를 구입한 뒤 기업에 빌려주는 리스사업은 쇠퇴하고 국제금융과 고위험 CP할인 분야는 가파르게 성장- 새내기 종금사 두가지 리스크 (1)대출해준 대기업이 한꺼번에 망하는 일, (2) 사업자금을 단기를 빌려준 쪽에서 만기 연장 거부. 1997년 두가지가 동시에 발생- 1998년 2월, 16곳(신한,삼삼,한화,쌍용,경남,고려종금 등)폐쇄, 1999년 한외, 현대, LG종금을 외환은행, 강원, LG증권에 통합, 대한종금은 퇴출#14 1996년 사상 최대 경상적자(‘강달러 쓰나미’외면, 정치권은 대선이 먼저였다)- 1995년 1월 17일 새벽 5시46분, 고베대지진(6,400여명 사망), 1995년 시티그룹 회장 미국 재무장관 취임 로버트 루빈 ‘강달러가 미국과 세계에 이득’논리로 ‘달러화 가치를 떨어뜨려 과도한 경상수지 적자 줄여야 한다’는 기존 정책 방향 완전히 뒤집기’- 1995년 2월 미국 기준금리 6%, 30대그룹은 1997년 한해에 1/3일 도산- 강경식 장관의 재정경제원은 무너진 신뢰를 되살리려 금융개혁법안 신속한 통과 총력, 국민회의는 회의 불참. 8월 태국, 10월 인도네시아, 11월 21일 구제금융신청- 1997년 12월 23일 달러당 1,962원, 엔화대비 원화환율 ‘고베 대지진’ (100엔당 804원)수준, 경상수지 적자는 401억 달러 ‘흑자’ #15 1997년 IMF 구제금융 신청(‘밀사’급파하면 IMF에 저항, 그 대가는 혹독했다)- 1997년 11월 16일 일요일 저녁, 강경식 경제부총리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 등 삼성동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미셸 캉드쉬 IMF총재와 구제금융 신청과 지원에 합의- 11월 19일 오후5시, 신임 임창열 경제부총리, “IMF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국제금융계에서 협력만 해준다면 위기를 해결해 나갈 수 있습니다”- 11월 28일 임창열 부총리는 직접 일본을 방문해 브리지론(임시융통 자금)을 요청, 자력 회생방안을 모색하였으나 이는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는 결과. 분노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화해 ‘IMF요구를 받아 들이라’고 경고- 1997년 12월 3일, ‘경술년 국권 피탈 이후 최악의 국치일’, IMF는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등 유력 대선 후보들에게도 ‘자금지원 협정 준수 이행 각서’에 서명하도록 요구, 콜금리 25%로 인상 + 제일은행과 서울은행 퇴출 + 9개 부실 종금사 영업정지 + 외국인 적대적 기업인수 허용법안 제출 + 외국 금융회사의 국내 금융회사 인수 허용계획 발표(한국 정부에 얼마나 강한 불신을 품고 있는지 짐작)- 1997년 12월 10일, 김대중 대통령후보, “IMF와 재협상하겠다”에 워싱턴포스트기사 “행동없이 급전만 요구하는” 한심한 나라는 “망하게 둬야 마땅”- 1997년 12월 23일, 환율 1,962원, 종합주가지수 366.36, 기업어음 금리 연 38%, 한국의부도 임박,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은 태도를 완전히 바꿔 IMF에 “약속을 1%도 어김없이 이행하고 한국 경제의 체질 개선 계기로 삼겠습니다”로 호소- 1997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선물’ 1998년 경제성장률은 -5.1%, 상장폐지 218곳 Behind #4 ‘검은거래’의 고리, CD Chapter 5서슬퍼런 구조조정 시대 개막, 고도성장기 유산을 청산하라!#16 1997년 금융개혁법안 통과(정부와 한국은행의 반세기 전쟁)- 1950년 블룸필드 박사는 조선은행 직원들과 5개월 동안 힘을 합쳐 ‘중앙은행 개편에 곤한 건의안’을 완성(한국은행 산파역할)- 한국은행법 개정의 세 번째 시도는 1997년, IMF는 금융개혁법안은 연내 처리하라고 압박, 1997년 12월 29일 임시국회를 열어 금융개혁법안을 속전속결로 처리- 1998년 4월 김대정부는 새 법에 따라 금융감독위원회를 설립하고 이헌재 초대 위원장 선임, 금융감독원은 1999년 1월 탄생, 금융감독원장은 금융감독위원장위원장이 겸직- 2008년 2월, 금융위원장은 금융감독원장 겸직 못하도록 했다 #17 1998년 은행의 강제퇴출(조상제한서의 몰락, 은행불사의 신화가 무너지다)- 1897년 조흥은행 뿌리 한성은행, 1899년 상업은행 전신 대한천일은행, 고종의 아들 영친왕이 은행장- 일제가 남긴 대표적인 적산이었던 은행은 소유권은 1950년대 중반 모두 기업인에게 매각, 이승만 정부가 ‘금융의 민주화’ 명목으로 공개 매각, 조흥은행은 조선맥주사장 민덕기, 상업은행은 대한제분 사장 이한원, 한국저축은행(옛 조선저축은행, 1958년 제일은행)은 삼호방직 사장 정재호, 한국흥업은행(옛 조선신탁, 1960년 한일은행)은 삼성물산 이병철사장에게 돌아갔다. 1959년 대한양회 창업자 이정림이 서울은행 창립- 1961년 5.16군사정변, ‘민간의 금융 독점을 배제하고 공익성을 보장하는 체제를 갖춘다. 1961년 7월, ‘은행의 대주주 의결권을 10%한도로 제한’(금융과 산업분리) +특수은행설립(1963년 국민은행, 1967년 외환은행, 1969년 주택은행) + ‘1도 1행원칙(10개 지방은행 설립)- 1998년 6월 28일 일요일, 금감위는 정상은행 5곳에 퇴출은행(대동,동남,동화,경기,충청) 5곳 접수하라는 통보. 외환위기 직전 16곳중 국민,신한,하나 3곳만 - 1998년 12월 31일 제일은행 미국계 사모펀드 뉴브리지캐피털에 매각. 국내은행의 첫 해외매각. 지분51% 5천억원, 공적자금 약17조원 3%수준- 2002년 서울은행은 하나은행에, 2003년 조흥은행은 신한금융지주에 매각, 1997년부 2001년 6월말까지 은행들에 투입한 공적자금은 53조원 #18 1998년 대기업 사업 구조조정(청와대의 극비 프로젝트, ‘5대 그룹 빅딜’)- 1998년 9월 3일 ‘5대그룹 7개업종의 구조조정계획’ . 5대그룹 계열사는 20곳으로 40%. 정부주도 구조조정으로 이로 인해 코스피지수는 4.85%급등해 500선 회복- 부실 계열사를 맞바꾼다는 아이디어는 단순하고 명쾌했지만, 무수히 많은 요소를 고려해야 하는 실무협상은 복잡하고 난해, ‘선인수 후정산’- 기아차. LG반도체. 한화에너지 등 싹슬이 하며 ‘최대 수혜자’로 시샘을 샀던 현대그룹은 2000년 최악의 위기, 정몽구. 정몽헌 형제 간 경영권 다툼인 ‘왕자의 난’, 현대건설에서 출발한 유동성 위기- 1999년 10월 LG반도체와 합병한지 2년내 현대전자, 2001년 한화에너지 인수한 현대정유는 법정관리, 나중에 빅딜을 피해갔던 모두 SK그룹으로 넘어감(SK하이닉스, SK인천석유화학)- ‘현대 편애’ 현대그룹의 대북 경제협력 사업도 비극적 결말. 2003년 8월 계동 사옥에서 정몽헌 회장 투신#19 1999년 대우그룹 워크아웃 신청(대우의 몰락배후에 제거 프로그램이 있었다)- 김우중회장 1998년 7월 31일 관훈클럽 조찬 간담회에서 공정거래위원회 부채비율 200%관리 목표를 맹비난, 정반대 논리, “외환위기를 극복하려면 금리를 낮추고 정책적으로 수출을 뒷받침 해줘야 한다” 신흥관료(강봉균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김태동 경제수석)들과 갈등- 환란 극복을 위해서는 구조조정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여론이 지배적, 김회장은 끝까지 “정리해고는 없다”라고 버텼다. 김회장은 대통령 면전에서 관료들을 “책상물림”으로 묘사하며 망신을 주기도- 1998년 가을, 금융감독위원회는 ‘대기업그룹 자본시장 독점해소’ 국내 투자신탁회사(현 자산운용회사)들에 회사채 투자잔액 비중을 제한하라는 공문, “동일 대기업그룹당 15%이내”, IMF처방에 따른 ‘대기업그룹 재무구조 건실화’정책- 대우 홀로 전체 무역흑자의 1/3을 달성, 한국 경제가 단군이래 최대인 416억달러의 무역흑자- 증권맨 출신 김정태 주택은행장과 삼성 금융계열사들이 정부의 ‘타깃’을 재빨리 알아채고 대우 관련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 당시 김우중을 가만히 뒀다간 구조조정이고 뭐고 다 날아간다는 인식이 경제 관료들 사이에서 굳어져 있었다- 1999년 7월 19일, 제일은행 등 100여곳의 채권금융기관들은 대우 지원계획, 김회장의 자산과 회사 주식을 담보로 4조원의 신규여신 제공, 경영권 6개월 유지- 1999년 11월 4일 금융감독원은 대우에 천문학적인 분식회계 의혹 제기, 2000년 9월 15일 분식회계 등 혐의로 대우 임직원 52명 검찰 고발, 2005년 4월 대법원 추징금 23조원 선고 Behind #5대우채 처리와 포퓰리즘- 1999년 8월 12일 금융감독위원회는 투신사(자산운용사)펀드를 해지하려는 개인들에게 대우채 관련 원리금을 거의 전부 갚아주겠다고 약속(3개월내 환매 50%, 6개월 80%, 6개월 이후 95%)- “대부분 개인은 은행 예금 들듯 수익증권을 샀다. 그런 개인에 책임을 묻는다?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이헌재 금감위원장 회고록, ‘위기를 쏘다’) > 89조원어치 채권 부실화 충격으로부터 빠르게 회복- 영민한 투자자들은 정무적 판단에 쉽게 휘둘리는 워크아웃 시스템의 허점을 간파. 부실 회사채와 기업어음을 헐값에 사들인 뒤 원리금을 정상적으로 상환받을 수 있는 둘도 없는 ‘저위험 고수익’의 기회- 채권단(협약채권자)에서 고통분담을 요구하면 소송을 동원하여 촌각을 다투는 워크아웃에 제동을 걸었다- 2011년 ‘저축은행 사태’, 2013년 ‘동양사태’, 2017년 산업은행이 소유한 대우조선해양은 “법정관리를 신청할 수 있다”라고 압박해 개인투자자들로부터 회사채의 주식전환(출자전환)동의를 얻어냈다. 법정관리를 신청하려는 기업에 “험한꼴”을 경고하면서까지 개인을 구제했던 ‘대우사태’를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상전벽해- 법정관리는 모든 채권자에게 손실을 공평하게 배분할 수 있는 방법Chapter 6밀레니엄 자본주의 시대를 연 주인공들#20 1999년 투자신탁회사의 몰락(펀드공룡 3투신은 왜 멸종했을까?)- 1968년 12월, 은행의 대출만으로는 기업의 원활한 자금 조달을 뒷받침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박정희 정부는 ‘자본시장 육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자산운용업(투자신탁업) 기능의 1호 금융회사인 한국투자개발공사 발족(정부와 시중은행 출자)- 1970년 5월, ‘수익증권(펀드)(안정성장1월호)’를 출시, 투공은 30여개 종목에 불과하던 상장주식과 채권을 운용해 첫해 가입자에게 27%수익(은행 정기예금금리 23%)- 1974년 9월, 증권사들의 공동출자로 한국투자신탁, 1977년 대한투자신탁(현 하나증권), 양사는 자산 운용은 물론 기업의 주식 및 채권 발행 지원(인수)까지 폭넓은 자본시장 조성업부 수행, 1982년 6월 국민투자신탁 인가, 1980년대 중반 저금리, 저유가, 낮은 원화가치 등 ‘3저 호황’으로 최고 전성기- 1981년, 1조원 수탁액, 1989년 17조원(지방 5개투신사 포함), 3투신은 정부의 과점 체제 ‘보호’의 대가로 금융정책을 뒷받침하는 ‘협조’ 창구 역할- 1989년말 1,000포인트를 돌파한 코스피지수가 서울올림픽 전후 완화가치 및 인건비상승으로 수출 기업의 실적이 급격히 나빠져 850까지 떨어지자 노태우정부는 투신사에게 시장개입을 지시- 1995년 8월, 김영삼정부는 금융자유화 명복으로 투신업과 증권업의 빗장을 푸는 증권산업 개편 방안’ 시행- 1997년 국민투자신탁은 대기업 투자받아 재무체력의 강화하려 국민투신증권으로 변신 현대그룹이 인수- 1998년 국투증권에서 자산운용업(국민투신운용)을 분리, 1999년 1월 현대투신운용으로 간판- 1998년말, 미래에셋자산운용투자자문의 뮤추얼펀드 ‘박현주1호’ 기록적인 수익률 기록- 1999년 봄, 현대투신운용(옛 국투)이 운용하고 현대증권 이익치회장이 판매하는 바이코리아 펀드가 ‘2005년 코스피지수 6,000돌파’전망 제시하며 파격적인 마케팅, 전체 수탁액 약250조, 바이코리아 11조원- 1999년 3월 바이코리아, 현대증권에서 5개월만에 11조원, but 8월 대우그룹의 워크아웃, ‘100조원 규모의 펀드환매- 1999년 8월 9일, 김석동 금융감독위원회 금융시장안정대책반장(과장)은 극비리 투신사 간부 소집, ‘8.12 대우채 환매연기 조치’(당장 환매는 대우채 원금의 50%, 6개월이상 95%, 부실 채권 처리 시간을 벌면서 개인의 투자손실을 대부분 투시사에 떠넘기는 정부의 극약처방) > 3개월동안 40조원 환매요청, 2000년 말까지 약 100조원, 부실 대우채 발행잔액은 모두 34조원- 투신권 불만나오자 금융감독원 대대적 검사, 각종 법규 위반 사실 들추기 시작, 펀드를 예금처럼 속여 팔고(불완전 판매), 고객 자산을 편법으로 바꿔치기 한 사례- 1999년 11월부터 한투,대투,국투의 파산 혼란 막기위해 공적자금 각각 5조원과 2.9조원, 2.5조원(2004년) 투입, 2004년 한투는 동원금융지주(현 한국투자금융지주), 2005년 대투는 하나금융그룹, 2010년 푸르덴셜금융그룹에서 한화그룹으로- 2004년 미래에셋자산운용이 ‘3억 만들기 펀드’로 적립식 펀드 붐 #21 1999년 20년 대장주의 탄생(삼성전자의 탄생, 그 뒤에 ‘한비사건’이 있었다)- 1999년 7월 한국전력을 누르고 삼성전자가 PC보급확대가 불을 지핀 반도체 특수로 처음으로 시가총액 1위- 1966년 9월 15일, 정부 보증으로 빚을 얻어 대규모 비료공장을 짓고 있던 삼성의 이병철회장은 비료공장의 자재인 OTSA라는 제품(인공 감미료인 사카린 원료)을 몰래 판 직원의 일탈을 ‘재벌 밀수’라는 삼성을 향한 ‘마녀사냥’식 공격(‘한국비료공업 사건’), 외화벌이를 위해 간호사와 광부의 독일 출국이 본격화하던 때, 국내 최대 그룹사의 밀수 의혹은 국민적 공분- 초선이던 김대중, 김영삼의원 등도 ‘권력이 재벌을 감싸고 돈 ‘빙산의 일각’이 드러났다’고 성토, “이 회장 구속 한비의 국가 귀속, 재무당국 처벌” 요구, 김두환은 9월 22일“국민의 사카린”이라면 분뇨를 의사당에 뿌림- 1966년 9월 22일 이병철회장은 한비 지분 51%를 모두 국가에 바치고 모든 사업에서손을 떼는 은퇴선언, 삼성의 신성장동력으로 10년을 매달린 한비사업이었음. ‘동양 최대 단일 비료공장’완공이라는 숙원 달성을 6개월 앞둔 시점- 1968년 2월, 이병철회장은 삼성물산 회장으로 조용히 복귀해 ‘개발부’신설, 한비를 대체할 신사업을 발굴하라는 지시, 2개월뒤 제일 앞 장에 전자사업의 밑그림- 1968년 봄, 안양CC에서 이병철회장은 초등학교 친구이자 사돈인 구인회 락희(현LG) 창업자와 커피마시다 전자사업 얘기, 상의도 없이 했다고 혼난 이회장은 인사도 없이 퇴장- 1968년 6월, 아사히 신문과 인터뷰를 통해 전자사업 진출계획 공표, 박정희 대통령을 설득해 제품 대부분을 수출하는 조건으로 허가, 1969년 1월 13일 ‘삼성전자공업’으로- 1970년 산요의 하청업체로 수출용 흑백TV를 생산 시작, 1974년에야 비로소 흑자전환- 1983년 2월 8일, ‘2.8 도쿄구상’, 반도체사업 진출계획, 당시 반도체 시장은 미국과 일본이 90%장악, 일본 샤프, 미국 마이크론과 기술 이전계약을 맺음- 1983년 9월, 용인 기흥에 반도체공장 설립 착공, 1980년대 중반 ‘3저 호황’의 절호의 기회. 1993년 세계 메모리반도체 분야 점유율 1위- 오늘날 삼성을 한국의 자랑이자 개혁의 대상이라는 ‘이중 잣대’, 2019년 4월 ‘2030 반도체 비전’, 세계 비메모리 시장 석권하겠다. 비메로리는 미국의 인텔과 퀄컴이 장악 #22 2000년 채권 시가평가 시행(‘검은 거래’의 관행을 뒤바꾼 혁명)- 현대의 한국 채권시장은 2만종 넘는 상품을 파는 대형마트와 비슷, 상품은 똑같이 1만원이라 쓰인 종잇조각- 1972년 ‘8.3 사채 동결 조치’, 사채시장의 규모는 3,456억원, 협의 통화의 80%, 박현주 미래에셋금융그룹 창업주가 대학원생 시절 주식을 배우러 찾아갔던 ‘백할머니’ 백희엽, ‘광화문 곰’ 고성일, ‘사채왕’ 단사천- 1982년 5월, 장영자, 이철희 부부 어음사기사건, 공영토건 등에 576억원을 주면서 5배인 2,624억원 어치 채권(견질어음)을 담보로 요구, 받은 담보는 단자회사 등에 되팔아 약1,400억원을 현금화하고 별정과 금괴, 고려청자 등을 사모으는데 썼다- 김철호 명성그룹 회장은 약1,000명의 전주를 상대로 사채자금 1,066억원을 조성, 544억원은 자금 조성비(선이자)로 다시 사채업자에게 주고, 1979년 명성콘도(현 한화리조트) 설립 수년 만에 명성그룹을 20개 계열사를 거느린 대기업 그룹으로- 대형 금융사기에 놀란 정부는 기업의 숨은 빚까지 상세히 파악하는 신용평가사를 설립, 1985년 종합금융회사 등의 출자로 한국신용평가 탄생- 1986년 은행들의 출자로 전국종합신용평가(현 NICE신용평가)를, 1987년에는 한국산업은행 자회사인 한국경영컨실팅이 한국기업평가로- 1998년 세종증권(당시 동아증권)을 인수한 김형진 회장은 1999년 8월, 300억원(액면)짜리 신동방 채권을 202억원에 산 뒤 같은 날 투신권에 267억원을 받고 되팔았다- 장부에는 처음 매입 당시 가격만 적어 놓아서 시장에 팔면 얼마를 건질 수 있는지 계산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 2007년 7월 부터 채권 시가평가를 전면 시행 계획 발표 Behind #6현대그룹 ‘왕자의 난’- 2000년 3월 14일, 이익치 당시 현대증권 회장(MH Line)을 고려산업개발 회장으로, 정몽구 현대그룹 공동회장(MK) 측근인 노정익 현대캐피탈 부사장을 현대증권 사장으로- 2000년 3월 24일 MH는 왕회장을 면담하고 오후5시 이익치 회장 인사를 백지화, MK일방적 인사조치에 왕회장 분노, 3월 27일 MH의 판정승, ‘MH의 현대 단독회장 체제’ 공식 승인, MK는 2000년 8월 자동차 관련 계열사들을 몰고 현대그룹을 떠난다- MH은 현대그룹을 손에 넣었지만, 현대건설과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가 경기침체와 유동성부족, 2001년 채권단에. 고강도 구조조정과 경영 퇴진, 사재출연 압박, 왕회장 사망. ‘불법 대북 송금 사건’ 2003년 비자금 조성 정황까지, 8월 4일 사망- 2004년 현대증권 소액주주들 주주대표소송, 이익치회장 재직중 치명적 각서 서명으로 회사에 끼진 손해배상 요구- 1997년현대전자가 사들인 주식 일부를 캐나다임페리얼은행(CIBC)에 팔때, ‘3년 뒤 손실을 볼 경우 일단 현대중공업에서 물어주되, 현대중공업에 어떤 부담도 가지 않도록 현대증권 및 현대전자가 보증한다’는 치명적 약속 - CIBC는 현대중공업으로부터 2,500억원 받아갔다. 중공업은 증권과 전자에 구상권, 소액주주소송 6년후 이익치 전 회장에게 이자포함 400억원 현대증권등에 물어주는 판결 Chapter 7거품 위를 걷는 사람들#23 2000년 닷컴 버블의 붕괴(신뢰의 붕괴가 몰고 온 코스닥 20년 침체)- 미국 경기는 최장기(1991~2001년) 호황을 만끽- 1998년 말 2,000개 수준이던 벤처기업은 2001년 10,000개 돌파- 1999년 골드뱅크커뮤니케이션즈(골드뱅크). 30세 김진호사장, ‘인터넷으로 광고를 보면 현금을 준다’, 15일 연속 상한가, 주가가 1년만에 50배- 1999년 6월 삼성SDS사내 벤처로 검색서비스업체 네이버컴(이해진 창업) 독립법인 출발- 1999년 6월 기준금리를 연5%로, 1년에 걸쳐 6.5%까지 인상, 한국은행 기준금리를 2000년 10월 연5.25%까지 올림- 1999년 8월 새롬기술(현 솔본)이 ‘무료 인터넷 전화’ 사업을 내세워 상장 6개월 만에 150배, 시가총액 3조원으로 현대자동차보다 높았다- 1999년 새해 764로 출발 6개월 만에 2,000선 돌파, 11월 26일 거래대금 2조원, 2000년 2월에는 거래소시장(현 유가증권시장)마저 추월- 2000년말 525로, 같은해 3월 사상 최고 2,834대비 81.5%하락 마감함- 닷컴 버블의 붕괴와 기업인의 각종 횡령.배임에 따른 충격은 코스닥시장을 긴 침체의 터널로 밀어넣었다- 1999년말 98조 7,000억원에서 2000년말 코스닥시장 시가총액은 29조원, 1년만에 70조원이 증발 #24 2003년 신용카드 사태(플라스틱 버블이 초래한 ‘신불자 400만’시대)- 2002년 새해 덕담 “여러분~! 모두 부~자 되세요!”, 한국 정부가 IMF 관리 체제를 공식적으로 졸업한 2000us 전후 한국 사회는 ‘부자되기 열풍’- 2002년 6월말 자영업자는 630만명,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도 목조주택사업의 실패를 딛고 일어나 ‘한신포차’를 개업- 카드산업의 급격한 부실화는 2003년 3월 SK글로벌 분식회계 사태를 촉매로 금융시스템 전체를 뒤흔드는 위협으로 발전, SK글로벌 사태 대책반장인 김석동 금융감독위원회 감독정책국장은 SK그룹 관련 채권의 환매 동향을 확인하다가 뜻밖의 현상을 발견, 투자신탁회사(자산운용사)들이 환매 대금을 마련하기 위해 90조원에 달하는 카드채 매물을 헐값에 쏟아내고 있었기 때문- 만기 도래 카드채를 상환할 새 카드채 발행 실패는 모든 카드사의 즉시 부도, 3월 17일 정부는 신용카드사의 자구 노력을 전제로 자금 지원하겠다는 ‘신용카드사 종합대책’발표- 삼성카드는 삼성생명으로 부터 5조원 금융지원, 2004년 국민,외환,우리카드 모은행으로 흡수합병, 1,400만 회원의 LG카드 그룹 지원만으로 회생불가능, 2003년 11월 21일 현금서비스중단, 2006년 신한금융그룹으로- 1998년 160만명의 신용불량자가 2004년 1월 400만명, 카드사들의 무분별한 현금대출 확대영업은 외환위기로 한계에 내몰렸던 많은 가계를 고리대금의 늪으로, 신용불량자는 40대이상이 52%, ‘부자되기 열풍’은 비극적인 종착역- 2004년 10월 신용불량자가 400만명, 국회 국정감사장, “김대중 정부 당시 신용카드 사용 촉진은 자영업자 소득 투명성을 높이려는 차원이지, 내수 진작 정책과 무관” 증인으로 출석한 이헌재 재정경제부 장관과 전임인 진념 장관- 대체 왜 한국에서만 세계 금융사에 유례를 찾기 어려운 ‘플라스틱 버블(무분별한 신용카드 사용)’이 발생한 것일까?, 카드사들이 경쟁적으로 현금대출(카드론, 현금서비스)창구를 열어 생계비이자 사업 자금 조달에 따른 카드빚 사용증가요인 #25 2004년 적립식 펀드 열풍(미래에셋 박현주의 신화는 여전히 유효한가)- 1998년 12월 14일, 40세 박현주사장, 한국 최초의 뮤추얼 펀드 ‘박현주 1호’ 조기완판, 회사형 펀드는 투자자가 개별 펀드의 주인(주주)으로 참여해 투명하게 운영 실적을 들여다 볼수 있는 상품, 한투,대투,국투의 소극적인 수익률 공시에 불만을 품고 있던 투자자들은 선지국형 펀든 상륙에 열광- 닷컴 버블을 등에 업은 눈부신 실적은 뮤추얼 펀드의 대유행을 이끔. 미래에셋벤처캐피탈(현 미래에셋캐피탈)도 다음커뮤니케이션 주식으로 ‘대박’, 24억 투자해 2000년 1월 1,000억원의 차익을 남기고 처분- 1999년 미래에셋증권 설립, 창업동지 38세 최현만상무에 경영을 맡김, 3월 ‘바이코리아 펀드’가세로 주식시장 천정부지, 여름 대우그룹 워크아웃신청, 펀드환매 있따름- 2000년 중반, 닷컴 버블 붕괴의 충격에서 펀드로 >> ‘사오정’ 분위기 >> 2003년3월, SK글로벌 분식회계와 신용카드 사태로 주식시장 512까지 하락 >> 2004년 연3% 정기예금 금리, 부동산시장으로 집값 무섭게 치솟자 >> 노무현정부 무너진 펀드 시장에 신뢰회복키로, 2003년 5월 주식형 펀드 장기보유 세제 혜택 >> 2004년 간접투자자산운용업법 시행으로 금융회사 책임과 공시 대폭 강화- 2004년 3월, ‘3억 만들기 적립식 펀드’ 매달 100만원씩 부으면 8년뒤 3억원을 모을 수 있다. - ‘부동산 불패 신화’와 싸우던 정부와 국회도 2005년 연기금의 주식투자 전면허용, 종합부동산세 도입, 여름 노무현 대통령 8천만원 적립식펀드 투자- 코스피지수 2005년 4번째 1,000선 돌파, 2007년 7월 사상최초로 2,000선- 2007년 10월, 미래에셋증권 세계시장으로 눈을 돌린, 연2.5%의 고액수수료의 ‘인사이트 펀드’- 2008년 서브프라임사태, 10월 코스피지수 1,000선 밑으로, 2015년 미래에셋, 대우증권 인수 #26 2006년 부동산 광풍(아파트 불패 신화가 낳은 ‘시한폭탄’가계빚)- 1962년 박정희정부는 주택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를 발족하고, 1964년 한국1호 아파트 마포아파트 10개동 642가구 건설, 1966년 33㎡(10평)의 시세는 90만원- 1988년 노태우정부 헌정사상 초유의 여소야대, 궁지에 몰린 노태우 정부는 투기 억제를 위한 ‘8.10종합대책’, 1988~1992년 분당, 일산, 산본, 중동, 평촌 등 신도시를 중심으로 무려 272만 가구 주택공급- 1989년 토지공개념 3법, 도시 빈곤층을 위한 영구임대주택- 1994년(30년뒤) 다시 태어난 마포삼성아파트 90㎡(27평)은 190백만원, 무려 200배- 1996년 전용면적 59㎡(25평)되는 아파트의 전국 평균가격은 130백만원, PIR(가구 소득대비 주택가격 배율)은 9배- 1997년 외환위기 이후 1998년 집권 당해 서울 아파트값이 15%나 하락하자 각종 규제 완화- 2001년 19.3%상승, 2002년은 30.8% 상승, 2005년 판교 신도시 공급카드 내놨지만 시장은 이미 통제불능, 2013년 100대 건설사 절반을 파산으로 내모는 100조원의 PF대출, 700조원대 가계부채 Behind #7‘불황을 꿈꾸는’ 슈퍼리치의 상품- 2006년 이후 슈퍼리치는 국고채 매입증가, 조장기 국고채 매집은 10년뒤 원금의 2배- 10년이상 장기 국고채 이자소득에 한해 최고 세율 41.8%인 ‘금융소득종합과세’적용을 배제.- 2007년 정기예금 이자율은 연5%대에서 2012년에는 3%대로 추락 Chapter 8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 ‘금융위기’라는 악몽#27 2003~2008년 원자재 슈퍼사이클(초호황 누린 조선.해운의 침몰, 위기의 서막을 열다)- 2003년과 2008년 사이 ‘원자재 슈퍼사이클’이 세계를 휩쓸고 감- 2004년 봄(태풍 ‘매미’가 휩쓸고 감), 한국은 터키에 이은 세계 최대 고철 수입국, 한국의 공급난 소식은 곧바로 세계 고철값을 요동치게, 과거 터키와 한국을 오가던 수많은 고철 운송선이 대거 중국으로, 전 세계 구리와 아연, 납 등 온갖 원자재 부스러기(scrab)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임- 1978년 집권한 덩사오핑은 중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만드는 대담한 실험, 개혁.개방의 물꼬를 튼 중국 경제는 이후 연10%안팎의 놀라운 성장- 13억인구의 원자재 수요는 1998년 주택 사유화 허용과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가입을 전후로 대륙의 공급 능력을 현저히 벗어나고- 2008년 올림픽 개회를 앞둔 수도 베이징과 상업도시 상하이는 타워크레인 ‘정글’, 골드만 삭스 수석연구원은 2005년 3월 ‘원자재시장이 슈퍼 스파이크(Spike)에 들어섰다’는 보고서, 당시 배럴당 50달러 국제유가는 수년내 100달러 도달 예상 전망- 중국경제는 2003년 10% 성장, 2007년 14.2%성장- 해운업체들은 치솟는 운임을 활용해 더 많은 돈을 벌 방법을 궁리, 빚을 내어 장기로 배를 빌리고(용선) 다시 비싼 값에 단기로 빌러주는(대선)사업을 공격적으로 확대- 수주 곳간을 가득 메운 조선업3사는 중국의 맹추격을 따돌릴 천우신조의 기회라 판단. ‘무마진’을 무릅쓰고 경험이 부족한 해양플랜트 공사를 따왔다. 기술력을 쌓아 미래에 고부가가치 시장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전략- 2008년 9월, 미국의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의 파산과 함께 거짓말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선진국 금융회사들의 급격한 자금회수, 모든 상품의 가격 급전직하, 선박 운임이 떨어지고 신조선 주문가격 급락, 신조선 주문이 끊기고 발주 취소-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은 2010~2011년 원자재 가격이 반등하자 선박 확중에 다시 한 번 ‘올인’, 2012년 심각한 재정위기에 빠진 피그스(PIGS : 포르투갈, 이탈리아,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 2013년 STX팬오션이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 2016~2018년 현대상선과 대우조선해양, 조단위 빚을 출자전환, 현대중공업은 1조원, 삼성중공업은 2조원 현금수혈, 2016년 한진해운 법정관리 #28 2008년 리먼브라더스 파산(‘도시락 폭탄’의 제조자들)- 1년전만해도 외환당국은 환율 하락을 걱정, 2001년 1,360원대 정점으로 계속하락, 수출산업 경쟁력 갉아 먹기만, 2001년 ‘닷컴 버블’ 붕괴로 미국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2003년 연간 1%까지 인하한 여파- 2007년 이자를 못 내는 채무자와 담보가치가 대출 금액보다 낮은 ‘깡통’주택 속출- 2007년 가을 900원, 무역과 재정의 ‘쌍둥이 적자’ - 2008년 봄, 세계6위 투자은행 베어스턴스 경영권을 JP모건체이스로, 뉴욕연방은행은 290억 달러(약30조원) 의 저리대출 지원- 2008년 여름, 글로벌 금융회사들 투자금 달러로 바꿔 회수- 2008년 5월, 광우병 공포가 촉발한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반정부 시위- 거래가 뜸한 점심시간을 틈타 시장에 달러를 쏟아부은 주체는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 환율의 추가적인 상승을 막으려는 외환당국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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